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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총회장 프로필 직업 나이 아내 이수정 IMF 외환위기 은마아파트 부산 역술인 백선생 운세 사주 꼬리에 꼬리를

by 다크그레이캣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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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총회장 프로필 직업 나이 아내 이수정 IMF 외환위기 은마아파트 부산 역술인 백선생 운세 사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3 72회

 



꼬꼬무 시즌3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총회장 프로필
직업 나이 아내 이수정
IMF 외환위기
은마아파트
부산 역술인 백선생 운세 사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3
72회




역사상 최초로 선보이는 2부작.

화려한 스타트를 끊은 현대 정주영 회장에 이어 30일은 한보 정태수 회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하며 많은 교훈을 줬던 정주영 회장과는 달리, 순도 200프로의 찐한 분노를 일게 할 예정입니다. 1969년 어느 날, 마흔일곱 살의 태수씨는 종로 5가 뒷골목에 위치한 오래된 여관을 찾았습니다.


그곳엔 당대 최고의 역술인이라 소문난 백운학 선생이 있었습니다. 세무서 말단 공무원이었던 태수씨는 곧 쉰을 앞두고 자식들 키울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태수씨에게 백 선생이 깜짝 놀랄 말을 꺼냅니다.



“당신, 공무원 때려 치고 사업 해! 대한민국 첫째 둘째가는 부자가 될 걸세.”
백 선생은 사업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습니다.

“당신은 토(土)의 기운을 타고났어. 흙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될 거야.”


흙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됩니다. 고민 끝에 두 가지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으니 바로 광산업과 건설 업이었습니다. 역술가 조언에 운명을 걸기로 한 태수 씨는 52세 나이에 세무서에 사표까지 던져버리는데 ‘정말 내가 큰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웬일인가! 과연 백 선생의 예언대로 태수 씨 사업은 승승장구했습니다. 헐값에 사들인 광산에선 광맥이 터지고, 세우는 아파트마다 완판 행렬이 이어집니다. 특히 강남 대치동 땅에 세운 ‘이 아파트’가 초대박이 났습니다. 강남 재건축 시장의 뜨거운 감자, 은마아파트가 바로 태수 씨의 작품입니다.



은마아파트로 단숨에 1,350억을 거머쥔 태수 씨는 10년 후엔 대기업 총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바로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었습니다. 50대에 사업에 투신하고도 자신만만했던 정 회장.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역술’이었습니다.

회사 위치는 물론, 본인의 거처까지 풍수지리를 깐깐하게 따지고 사업 중대사도 역술가와 상의해 결정하는데 정 회장이 ‘역술 경영’을 한다는 소문이 떠돌 무렵, 그에게 불길한 예언이 찾아듭니다.


“정 회장, 당신 운은 60세를 전후해서 끊길 거야.”


백 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또 한 명의 역술인 ‘부산 박 도사’였습니다. 살아있는 토정이라 불리던 박 도사는 정태수 회장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어있다고 예언하는데 전설의 역술인 두 사람 중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그리고, 정태수 회장의 탄탄대로는 정말 타고난 운명 덕이었을까요?




1997년, 그해 겨울은 국민들에게 유독 길고 시린 계절이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부터 굴지의 대기업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진 국가 부도 사태. 1997년 IMF 외환위기의 도화선에 정태수 회장과 한보가 있었습니다. 재계 순위 10위권 진입을 꿈꾸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던 정 회장은 이번엔 ‘흙’ 대신 ‘철’로 승부수를 던집니다. 충남 당진 앞바다를 메워 지은 꿈의 제철소 ‘한보철강’.


그러나 그것은 몰락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온통 빚으로 지은 꿈의 제철소는 한보그룹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를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역술경영과 정관계 로비, 회장님들의 휠체어 투혼까지 우리 경제의 어두운 그늘마다 정 회장이 있었습니다. 성공 신화가 아닌 실패와 몰락의 역사로 기록된 정태수 회장의 숨겨진 경제 비사를 집중 조명합니다.


최다 출연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친구도 등장했습니다. 자타공인 장도연의 찐친, 개그맨 김용명입니다. 시작부터 정 회장의 관상을 정확하게 짚으며 제작진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97년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청문회 영상 속 정 회장의 모습을 보며 분노를 넘어 황당한 웃음까지 보였습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로 다시 찾아온 에이핑크 보미. 대선배 현성의 질문 쇄도에도 유쾌한 답변을 이어가며 2회차(?) 다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90년대생에게는 다소 생소한 정 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 멋있다’라며 극찬하던 것도 잠시, 하나둘 밝혀지는 흑막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2천만 영화의 원작 웹툰 '신과 함께'에 이어 방송계까지 접수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주호민이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반말모드에 돌입하며 긴장을 풀었지만, 간식으로 등장한 ‘이것’ 때문에 첫 출연부터 묵언수행 위기에 처했습니다. 입만 열면 웃음 타율 10할의 주호민을 입꾹(?)하게 만든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벌회장 시리즈의 마지막 편, 일흔두 번째 이야기 '흙과 철의 사나이- 정 회장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3월 30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3 72회에서 공개됩니다.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 프로필 나이 고향
鄭泰守
▶출생 : 1923년 8월 13일 경남 진주군 미천면
▶사망 : 2018년 12월 1일 (향년 95세)
▶경력 : 한보상사 회장
한보주택 대표이사 회장
한보종합건설 대표이사 회장
한보그룹 회장
한보탄광 대표이사 회장
대한하키협회 회장
한보철강 대표이사 회장
한보그룹 총회장





가계도

정용석 (1899 ~ 1969) / 妻 황맹옥 (1904 ~ 1979)
1남 정태수 (1923 ~ 2018) 전 한보그룹 총회장/ 前妻 김순자 (? ~ 1959)
1남 정종근 (1954 ~ ) 전 한보그룹 목재소그룹 회장
1녀 정희자/ 後妻 이수정 (1938 ~ 1983)
2남 정원근 (1962 ~ ) 전 한보그룹 제약소그룹 회장
3남 정보근 (1963 ~ ) 전 한보그룹 회장
4남 정한근 (1965 ~ ) 전 한보그룹 금융소그룹 회장



생애

1923년 8월 13일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 미천면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정용석(鄭用錫, 1899. 4. 9 ~ 1969. 11. 3)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맹옥(1904. 10. 5 ~ 1979. 7. 27)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소학교만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그리 넉넉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식적으로 진주농림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으로만 다닌 것이고 실제로는 다니지 않았다고 사석에서 얘기하곤 했다. 나중에 세무공무원을 할 정도면 머리는 좋았던 듯하다.


1949년 김순자와 혼인 후 1951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1951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세무공무원으로 재직했다. 초기에는 부산과 경남지역 세무소에서 주사보로 일하다가 1959년경 부인 김씨와 사별해 서울로 옮겼다. 하지만 조선일보 여성잡지 필 1997년 5월호에 따르면 경남 진주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66년에 성주 이씨 이수정(李受貞, 1933. 3. 16 ~ 1983. 3. 29)[6]과 인연을 맺어 재혼했다.




흙을 만지시오

하지만 말단 세리로서의 일이 싫증이 나기도 했고, 이름을 태준에서 태수로 바꿀 정도로 역술에 관심이 많기도 했다. 그래서 1969년 가을 즈음에 친구와 같이 점쟁이를 찾았는데 "직장 그만둬, 사업을 하면 대한민국에서 첫째, 둘째 손가락에 꼽히게 될 것이야",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성공한다"라는 점쟁이의 조언을 듣고 나서부터 귀가 솔깃하여 사업 대상을 몰색하려고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돌을 수집했고, 진짜로 몰리브데넘 광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치 월급 정도 되는 헐값으로 광산을 인수한 후 수백 배의 차익을 남기고 판뒤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에 한보상사를 설립함으로써 그 길로 사업가로 전직했다. 그게 한보그룹의 시작이었다.




한보그룹은 땅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성공한다는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공무원 재직 시절 쌓은 인맥을 이용, 대출 받은 돈을 통해서 구로구에 영화아파트[8]를 지어서 돈을 번 뒤 1979년 9월에는 은마아파트를 지었다. 헐값에 쓸모 없어 보이는 땅을 산 뒤 거액의 자금을 빌려서 4년 후에 건축된 미도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은마아파트의 완판으로 2,000억 원을 손에 쥐며 재벌로 거듭나게 된다. 은마아파트를 짓던 도중 부동산 규제가 걸려서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때 마침 2차 오일 쇼크로 화폐 가치 하락과 함께 부동산이 안전 자산으로 각광 받으면서 20일 만에 완판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1983년 3월에 강릉영동대학을 인수하였으며 1983년 11월에는 대치동 미도아파트를 건설했다. 한보의 건설업 성공에는 부인 이수정의 역할이 컸는데, 그녀는 1983년 암으로 숨지기 전까지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들에게 대접할 새참을 손수 나르고 자금 조달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태수 본인은 부인 이씨 사후 안장된 경기도 김포 묘소를 6개월 간 화려하게 꾸몄다.



쇠를 만지시오?

아파트 사업의 성공 후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서 해외건설 사업에 진출했고, 1982년 한보탄좌개발을 세워 탄광사업에도 나섰으며 1984년 금호산업으로부터 철강부문을 인수했다. 1991년에 수서사건으로 경영에서 물러났지만, 1993년 총회장으로 추대된 후 경영 일선에 복귀해 상아제약도 인수해 제약사업에 나섰으며 1995년에 부실건설사 유원건설을 인수했다. 1996년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외에도 당진제철소 건설을 주도했다.


다만 무리한 사업확장이 독이 되어 1997년 2월에는 그룹이 부도나고, 5월에는 공금 횡령 및 뇌물 수수 혐의(한보사태)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때 한보 리스트가 정치, 사회상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정태수 리스트와 관련된 은행장이나 여/야 정치인(권노갑, 문정수 등)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기소되거나 감옥에 갔고, 청문회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개입 의혹까지 불거져 김현철 국정농단 사건으로도 번졌다.

청문회 당시 정태수의 별명이 자물쇠, 모르쇠로 자기에게 불리한 질문들은 그 역시 재판중이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겠습니다.로 부인하였다고 한다. 특히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계열사 사장)이 뭘 압니까" 이 발언은 당시 샐러리맨들의 자조섞인 신세한탄에 인용되곤 했다고 한다. 계열사 사장이면 그래도 샐러리맨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인데, 그룹 오너가 이들을 머슴으로 볼 정도이니 당시 한국사회에서 재벌이 가진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준 발언이기도 했다. 심지어 청문회 출석 당시 휠체어를 타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7년 외환 위기를 일으킬 단초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모기업 (주)한보는 진흥기업 및 일본 야마토공업, 한보철강공업은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 대성목재는 동화기업, 한보건설은 미국 울트라컨, 상아제약은 녹십자 등에 각각 인수되었다.

사업 결정에 점쟁이의 조언을 곧잘 들었던 정태수였기에, 한보사태 후 세간에 "당신은 쇠를 만져야 큰 돈을 번다."는 조언을 듣고 제철 사업을 시작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세무에 밝고 사업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공직자 출신으로 대기업을 일굴 만큼 철저한 연구와 수완을 갖췄던 정태수의 면모를 볼 때 이 쇠는 사실 금속이 아니라 동전, 즉 금융업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실제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종금사들은 12개월 이내의 저이율 외채를 끌어들여 다시 동남아시아 등지에 0%의 이율을 얹는 방식으로 앉아서 떼돈을 벌었던 만큼, 차라리 금융업에 손을 댔더라면 1990년대 후반의 종금사 퇴출 사태를 비켜갈 만한 새로운 금융사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금산분리 때문에 한보그룹은 은행 등 주요 금융업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나마 최선이 한보선물(선물회사), 한보상호신용금고(저축은행) 등 금산분리가 적용되지 않는 제2금융권에 한했다.


말년

이후 5년 5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2002년 10월 고혈압과 협심증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의 교비 72억 원을 횡령[13]하여 또 잡혔고,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2심 재판 도중 2007년 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그대로 해외로 도피했다. 그 뒤 아직도 잡히지 않은 상태다. 관련기사 나이를 고려하면 이미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2017년 6월 11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조용래를 통해 넷째 아들인 정한근이 "정태수가 아직 살아 있고, 자서전 초고를 만들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2019년 6월 11일에 정태수의 아들 정한근이 체포되었다. 검찰에게 "정태수가 1년 전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검찰은 그가 2019년 6월말 현재 기준으로 최근까지 키르기스스탄[15]에 머물렀다고 확인돼 국내 송환을 추진해 왔었다고 밝혔다. 어느쪽 말이 맞는지는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아들인 정보근이 아버지 도피를 도왔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동월 2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또다시 보도됐다.

정태수가 에콰도르에서 사망한 것이 검찰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징역형 등 형벌은 범인의 사망으로 형 소멸이 되었으나, 체납세액은 상속인에게 승계되었다.


2020년 4월 1일 정한근은 1심에서 징역 7년과 추징금 401억 3천여만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정한근과 검찰이 모두 항소하였으나 2021년 1월 22일 2심 법원은 양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여 1심의 형을 그대로 선고했으며, 2021년 5월 13일에는 결국 정태수의 4남 정한근에 대한 징역 7년의 형과 401억여원의 추징금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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