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송정보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재 작곡가 알로이지아 베버 의혹 콘스탄체 첫사랑 아내 생애 키 나이 이중생활 출연진 프로필

by 다크그레이캣 2023. 4. 14.
반응형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재 작곡가 알로이지아 베버 의혹 콘스탄체 첫사랑 아내 생애 키 나이 이중생활 출연진 프로필 민은기 교수 재방송 94회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재 작곡가
알로이지아 베버 의혹
콘스탄체 첫사랑
아내 생애 키 나이 이중생활
출연진 프로필 민은기 교수  
재방송 94회




4월 11일(화) 방송되는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3  94회에서는 600곡 이상을 탄생시킨 불멸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중생활에 대해 알아봅니다.

이날 강연자로는 세계적 명성의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3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대 음악학과 민은기 교수가 출연합니다.


민 교수는 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모차르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반전이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해 궁금증을 증폭시킵니다. 먼저 민 교수는 3살에 연주를, 4살부터는 작곡을 하기 시작해 일찌감치 음악 신동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모차르트가 12살에는 오페라까지 작곡하며 초연부터 대성공을 거두는 등 클래식계의 아이돌, 음악계의 셀럽으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성공에는 아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 교수는 도박과 내기 당구를 일삼던 빚쟁이 등 그동안 몰랐던 모차르트의 반전 모습을 소개하며 충격을 안깁니다.

특히 모차르트의 재능을 질투한 라이벌로 잘 알려진 살리에리와의 관계에도 반전이 있었다는 사실에 MC와 게스트 모두 깜짝 놀랐다는 후문입니다. 민 교수는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등 모차르트의 걸작과 함께 천재라는 이면에 가려진 음악가로서의 고뇌, 신동에서 아티스트로 발전해가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소개하며 모차르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해를 도울 예정입니다.


규현은 뮤지컬 모차르트의 넘버 '나는 나는 음악'을 현장에서 직접 부르며 강연의 몰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날 강연에는 주제와 딱 맞는 여행 메이트들이 함께 해 한층 풍성한 강연을 만들어갈 전망입니다.


바로 모차르트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케이디와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이 출연한 것입니다. 케이디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차르트를 사랑한다”고 밝히며 1890년부터 판매된 모차르트 초콜릿을 스튜디오에 가져오는가 하면,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 역할을 맡기도 한 김소현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사생활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전해줄 예정입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3  94회는 4월 11일 밤 10시 10분 방송됩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로필 나이 키 생애
Wolfgang Amadeus Mozart
▶출생 :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잘츠부르크(現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사망 : 1791년 12월 5일 (향년 35세) 합스부르크 제국 빈(現 오스트리아 빈)
▶묘소 : 오스트리아 빈 성 마르크스 묘지
▶국적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족 :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년~1787년),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1720년~1778년)
▶배우자 콘스탄체 모차르트(1782년 결혼 ~1791년 사별), 슬하 4남 2녀
▶종교 : 천주교
▶신체 : 163cm


이탈리아에서 구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어느덧 17살이 되었으며, 이제 신동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잘츠부르크에서 본격 직업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에게 여기저기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하였다.

더보기



이 시기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피아노, 바이올린 등),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등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유럽클래스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운신하기에는 너무 좁은 동네였다. 그는 밀라노에서처럼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하고 싶어 했으나 잘츠부르크에서는 마땅히 공연할 곳이 없었다.




운영비용 문제로 궁정 극장은 1775년 문을 닫아버렸으며 다른 극장은 오페라를 제대로 상연하기에는 크기나 시설이 너무 부실했다. 그런 탓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스키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이나 <양치기 왕(Il re pastore, K.208)> 같은 소규모의 오페라밖에 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잘츠부르크 궁전에서 한두번 연주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는 이런 사안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었는데, 슈라텐바흐가 1771년 사망한 후 이듬해 새로 잘츠부르크 영주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콜레레도 대주교(Archbishop Hieronymus von Colloredo)와의 마찰이었다.


무난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전임 영주와 달리 이 콜로레도 대주교는 상당히 깐깐하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굳이 음악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음악에 대한 이해나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박했다. 다만 무작정 꼰대라고 하기엔 좀 특이한 성향의 인물이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는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나름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볼테르를 존경했다.


심지어 그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집무실에 볼테르의 초상화까지 걸어놓았을 정도였는데, 가끔씩 보수적인 인사가 손님으로 오면 초상화를 가리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전임 대주교에 비해 음악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공교롭게도 이런 계몽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카톨릭 성직자였지만 나름 개혁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존 카톨릭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배격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검소함과 경건함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이나 미술 음악 등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꺼려 했으며 심지어 카톨릭 행사에 프로테스탄트에서 사용하는 코랄을 도입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의 궁정 극장이 폐쇄된 것도 이런 연유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나름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모차르트와 같은 예술가 입장에서는 당연히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미건조하고 교양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튼 이 괴짜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당시 시세로도 말도 안되게 낮은 연봉 150 플로린밖에 주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의 재능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유럽클래스의 음악가 반열에 오른 모차르트가 이런 답답한 사람 밑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젊은 모차르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대주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고 그와 자주 충돌했다. 결국 모차르트는 본업을 사실상 비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을 올린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774년 9월에 빈을 방문했고 1달 후에는 뮌헨을 방문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뮌헨의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모차르트에게 대위법이 돋보이는 모테트 하나를 써보라고 권했는데 3일만에 작곡해서 바쳤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K. 222). 또한 선제후는 뮌헨의 사육제기간에 상연할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라고 의뢰했으며, 덕분에 그의 초기 오페라 중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가 작곡되었다.



1775년 1월에 이루어진 <가짜 여정원사>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아쉽게도 해당 극장에서 상연해야 할 작품이 밀려있던 관계로 모차르트의 작품은 3번 공연 후 내려가고 말았다. 이처럼 뮌헨의 선제후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끝내 자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1777년에는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해 버리고 모친과 함께 다시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서는 모차르트가 찰츠부르크에서 고용주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막시밀리안 선제후의 태도는 3년전보다 더 냉랭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일단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라는 등의 뜬금없는 조언만 하고 돌려보냈다. 낙담한 모차르트 모자는 만하임으로 떠났다. 만하임에는 유서깊은 교향악단이 있었고, 모차르트는 이 악단에 취직하고 싶어서 만하임의 카를 테어도어 선제후에게 청원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대신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그녀의 음악선생이 되었는데, 둘은 곧 사랑에 빠졌으며 모차르트는 청혼까지 했다. 당시 모차르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졌냐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상당히 허황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

하지만 그녀의 재능만큼은 모차르트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알로이지아는 이후 당대를 풍미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당시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2곡을 작곡했는데(K. 294, K. 316), 둘 모두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요하는 작품이며 특히 '테살리아의 백성들이어!(Popoli di Tessaglia!, K. 316)'는 기네스북에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고음을 내야 하는 아리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난곡이다.




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일만 잘 풀렸더라면 두 사람은 큰 문제 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는 직장을 사임하고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해서 상당히 많은 빚을 진 상태였으며, 아들의 출세에 목을 매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구직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는 전술한 든든한 후원자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이 있었으며 그는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고 구직을 위해 높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구직도 영 신통치 않았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및 작곡 알바로 돈을 충당하면서 약 6개월간 나름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가니스트같은 내키지 않는 제안만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차르트와 동행했던 그의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모차르트는 파리에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파리 교향곡 같은 몇몇 작품만 남긴 채 쓸쓸하게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처럼 자기 아들이 외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내마저 허무하게 잃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레오폴트는 이 지역 귀족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연 450 플로린의 급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냈고 콜로레도 대주교로부터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초청이 있을 경우 출장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며 모차르트의 귀향을 종용했다.

당연히 모차르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후원자였던 폰 그림 남작까지 당장 파리에서는 취직이 어려울 것 같으니 고향에서 재기를 노리는게 어떻겠냐고 권하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복귀를 결심한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 가기 싫었던 모차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이곳 저곳을 들르면서 복귀에 뜸을 들였다. 이 시기에 다시 뮌헨을 거치는데, 이 때 뮌헨에 취직하여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알로이지아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의 재회는 썰렁하게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지아를 포함하여 그 집안의 여인들은 모차르트와 평생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일종의 운명의 장난처럼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도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만하임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일단은 전업가수로 성공한 베버집안의 요세파와 알로이지아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으로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집안에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적절한 돈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숙박업. 여기에 모차르트가 머물면서 그의 인생 2막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콜로레도 대주교의 빈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저택의 별사(別舍)에 머물렀는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때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여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국 결혼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에 결혼은 사치라는 것이 그 이유. 게다가 콘스탄체의 어머니 세실리아 베버도 처음에는 모차르트를 음악을 한답시고 일정한 직업도 거처도 없이 빈둥대는 백수건달 정도로 여겼던 탓에 두 남녀가 너무 가까워지자 모차르트에게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모차르트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아버지는 결국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세실리아 베버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오히려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부추겼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1782년 8월 4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모차르트의 가족들(부친과 누나)은 참석하지 않은 채 콘스탄체 집안 사람들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모차르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은 일찍 죽었다.


20세 무렵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1762-1842)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다수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본인의 연주로 공연되었는데, 공연때마다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 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하였다. 한편 당시 국립징슈필극장(Nationalsingspiel)[33]의 감독이자 대본작가였던 고틀리브 스테파니(Gottlieb Stephanie)는 신성 로마 황제 요세프 2세로부터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를 상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스테파니를 설득하여 이 오페라의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징슈필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탄생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헨델/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성악 처리법에 주목한다.


이런 작곡수법들은 이제까지 모차르트가 접하지 못했던 것들로 모차르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 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6곡의 하이든 사중주는 모차르트의 실내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들로 음악적 가치 못지 않게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에 12월에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K.477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Maurerische Trauermusik)이나 K.623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소 칸타타(Little Masonic Cantata).

그리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 최후반기에 작곡된 2개의 징슈필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 592a)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를 프리메이슨의 사상에 의거하여 씌어진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이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도 했는데, 특히 프리메이슨 동지이자 방직업자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에는 마스터 메이슨까지 올라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