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명곡 청력 이상 장애 우울증 생애 키 나이 불멸 예술가 대혁명시대 출연진 프로필 경희대 조은아 교수 ott 재방송 103회
벌거벗은 세계사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명곡
청력 이상 장애 우울증 생애 키 나이 불멸 예술가
대혁명시대 출연진 프로필 경희대 조은아 교수
ott 재방송 103회
6월 13일 벌거벗은 세계사 103회 에서는 음악사에서 신화적 존재로 추앙받는 ‘불멸의 거장’ 베토벤에 대한궁금증을 낱낱이 파헤쳐 봅니다. 이를 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조은아 교수가 강연자로 나섭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유럽의 다양한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한 조 교수는 음악과 인문학을 융합한신선한 강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날은 첫 강연을 맡아 베토벤의 다사다난했던 음악 인생사를 들려줄 예정으로 기대감을 높입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드러낸 베토벤은 고향인 독일은 물론, 음악의 도시 빈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귀족들에게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괴짜 천재’의 면모마저 드러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베토벤에게는 청력 이상이라는 치명적인 장애가 찾아옵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청력상실의 위기를 맞이한 베토벤은 유서를 작성할 정도로 상심했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음악으로 극복해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작곡기법으로 불후의 명곡들을 완성했습니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베토벤이마지막으로 지휘한 70분 대서사시의 숨은 비밀,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 당대 음악가들과의 인연도 흥미진진함을 더할 전망입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103회는 6월 13일 (화) 밤 10시 10분 tvN에서 방송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이 프로필 키 생애 국적
루트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출생 : 1770년 12월 16일 신성 로마 제국 쾰른 선제후국 본
사망 : 1827년 3월 26일 (향년 56세) 오스트리아 제국 빈
국적 : 독일 연방
직업 : 작곡가, 음악가
장르 : 클래식
악기 : 피아노, 오르간
활동 : 1778년 ~ 1827년
신장 : 162cm
1787년에는 쾰른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으로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여행을 갈 수있었다. 이때 평소 존경하던 모차르트도 만났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난적이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만나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는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1787년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의 음악가 베토벤을 굳이 만나 주었을지는 의문.
더군다나 1787년 베토벤의 1차 빈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두 사람의만남을 부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리고 그 해, 어머니가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1789년에는 알코올중독으로 생활력을 상실한 아버지 대신 가장의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아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 루트비히였지만 당시 음악의 본고장 빈에서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는 1792년 고향의 귀족들과 절친들의 도움으로 막시밀리안 프란츠 선제후에게 일정기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후원금으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에 꿈에도 그리던 빈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또 빈에서 저명한 음악가인 요제프 하이든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선도 받았다. 빈에서 베토벤은 계획한 대로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하이든의 지도방식에 불만을 가졌으며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똑같이 제출했다가 들키는 등의 뻘짓을 한 베토벤을 되먹지 못한 녀석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베토벤과 하이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항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는 귀족이나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능력은 귀족들에게큰 인기를 끌었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기간이 끝났지만 곧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얻었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1795년에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등의 레파토리로 정식 공연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아직 모차르트와 하이든이라는 선배 대작곡가들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미 중기 이후의 그의 빛나는 음악적 성과의 서광도 충분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베토벤은 이때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가로선 치명적이라 할 만한 문제를 안게 된다. 베토벤은 이 귓병 때문에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라는 질병은 사실상 사형선고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친구들 기록을 보면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람 만나기를 꺼리며 엄청나게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유서에서는 갈수록 악화되는 청력과 사신의 예술혼과의 괴리에 대한 고뇌,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와 시선을엿볼 수 있다. 그러나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새롭게 결의한 베토벤은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감람산의 예수그리스도"에서는 사망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 1804년은 베토벤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해인데, 바로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한 획을 그은 발트슈타인 소나타(Waldstein Sonata, op. 53) 가 작곡된 것이다. 이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에성공했다. 기존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장대한 전개부를 가진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2악장은 당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이었으며 이 실험은 음악사에서 역대급으로 불릴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그도 결국다른 인간들처럼 사기꾼일 뿐이었어!"라고 격분한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웅 교향곡부터 약 10년간 베토벤은 절정의 물 오른 창작열을 발산해 많은 걸작을 탄생하게 했다. 영웅교향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 후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음악의심오함은 공교롭게도 그의 청력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즉, 베토벤이 청력이 악화된 이후로 사람들과 만나 사교를 즐기는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이것이 그의 음악적 깊이가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했다는 것.
실제로 베토벤은 당시에 청력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들의 작품에 빠져 들었고 칸트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대의 대문호인 괴테나 쉴러의 작품도 열독하였다. 대음악가 답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킨 것. 베토벤은 이전 작곡가들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후원받았지만 그귀족들에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유럽 각국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의 악보를 인쇄해 판매한 덕에 베토벤은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소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이 편지의 주인공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불멸의 연인 문서를 참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을 향해 치닫던 1814-1815년 무렵은 베토벤의 명성[19]이 절정에 이른 때이기도 했다. 1813년에는 교향곡 웰링턴의 전승을, 1814년 초 독일 해방전쟁이 임박하자 전투적 합창가인 게르마니아의 부활을 작곡했다. 나폴레옹군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독일에서 물러난 이후인 1814년 11월 29일에는 왕후들을 청중으로애국적 가곡인 영광스러운 순간을 지휘하였고, 1815년 파리 함락과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 즈음에 합창곡 모두 이루어지다를 작곡하였다.
한편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전 유럽 국가들이 전후처리 과정을 논하기 위해 빈 회의가 소집되었다. 빈회의 개회 기념행사에서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가 재상연되었고 교향곡 제7번과 제8번도 연주되어가히 베토벤의 일생에서 명성이 정점에 달했다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당시 시대상에 부응하여 쓴 작품들은 다른 작품보다 당대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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