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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전쟁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프로필 생애 키 나이 인도 스리니바스 마다비 파리 부티크 영국 사업가 아서 카펠 섬유 재벌 친구 장교 에티엔 발상 40회​

by 다크그레이캣 202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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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전쟁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프로필 생애 키 나이 인도 스리니바스 마다비 파리 부티크 영국 사업가 아서 카펠 섬유 재벌 친구 장교 에티엔 발상 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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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전쟁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프로필 생애 키 나이   
인도 스리니바스 마다비
파리 부티크 영국 사업가 아서 카펠 
섬유 재벌 친구 장교 에티엔 발상
40회​





6월 21일 장미의 전쟁 40회​​에서는 100년 패션 역사를 이끈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숨겨진 커플 스토리가 공개됩니다. 날 프리젠터 정다희는 가브리엘 샤넬의 연애사에 대해 소개합니다. 또한 샤넬이 독보적인 패션을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남자 덕분이었다고 말해 그녀의 연인들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킵니다.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냈던 샤넬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프랑스 장교 에티엔 발상을 만나며 180도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녀는 에티엔의 정체가 프랑스 섬유 재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신분 상승을 목표로 그를 유혹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으로 에티엔 앞에 나타나 그의 마음을 얻어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은 물론, 에티엔 앞에 입었던 한 벌의 옷으로 패션계의 센세이션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상류사회로 진입한 샤넬의 욕망은 섬유 재벌 에티엔의 친구 아서 카펠이 나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패션 사업을 꿈꾸게 된 샤넬은 에티엔과 이별하고 아서와 연애를 시작합니다. 영국 사업가였던 아서는 샤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파리에 부티크 1호점을 차려줍니다. 



이때 샤넬의 상징인 ‘블랙 미니 드레스’가 탄생하며 상류층이 찾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샤넬과 아서의 이야기에 김지민은 “그러면 안 되지!”라며 씁쓸함을 표해 샤넬의 연애 방식에 더욱 이목이 집중됩니다. 이날 프리젠터 김지민은 기적을 만든 한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도에 사는 스리니바스는 가족들의 꿈이 담긴 드림하우스 완공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아내 마다비를 잃습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아내의 빈자리에 공사는 중단됐고 딸들과 망연자실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남편은 우울증에 빠진 딸들을 위해 아내의 생전 소원이었던 드림하우스 공사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나 1년 후 집들이 당일, 초대된 손님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내 마다비가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이에 함께 현장의 영상을 보던 출연진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이상민은 "잠을 잘 못 자서 고개를 못 돌렸는데, 놀라서 목이 나았다"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죽은 아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기적 같은 이야기는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날 프리젠터 이상민은 한 커플의 실종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 파티에 참석한 메리와 그녀의 남자친구 크레이그가 낯선 이와 함께 탄 차를 탄 이후 자취를 감춘 사건이었는데요. 이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메리의 친구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되면서 사라진 커플과 실종 이유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차주였던 임산부 샬린과 그녀의 남편 제럴드! 소환 요구에 불응하며 사건에 대해 함구했던 부부지만 마침내 입을 연 아내 샬린으로 인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집니다. 커플의 실종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정도로 부부가 숨겨왔던 엄청난 비밀이 있었는데요. 이에 출연진은 “사람이란 말도 아깝다”, “너무 화가 난다”며 경악했고 김지민은 “사이코패스 아니냐, 이런 남자는 절대 만나면 안 된다”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격정으로 치닫는 사연에 스튜디오가 순간 싸늘해지며 정적에 휩싸였습니다.장미의 전쟁 40회​는 6월 21일 방송됩니다.




코코 샤넬 나이 키 프로필 국적 생애 
본명 :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Gabrielle Bonheur Chanel
출생 :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멘에루아르 소뮈르
사망 : 1971년 1월 10일 (향년 87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 프랑스
신체 : 169cm
직업 :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간첩
수상 : 니먼 마커스 패션 어워드 (1957)​



샤넬 생애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수녀원의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투철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고,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샤넬을 촌x이라고 디스한 것은 덤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으로 넘어가서 현재까지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샤넬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온 그녀였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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