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송정보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프로파일러 배상훈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고백 여순사건 여수 순천 사건 친가 쪽이 집단 학살 피해자 공군사관학교 연좌제 불합격

by 해피냥냥이 2024. 1. 3.
반응형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프로파일러 배상훈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고백 여순사건 여수 순천 사건 친가 쪽이 집단 학살 피해자 공군사관학교 연좌제 불합격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프로파일러 배상훈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고백
여순사건 여수 순천 사건
친가 쪽이 집단 학살 피해자
공군사관학교 연좌제 불합격

 

 

 

프로파일러 배상훈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고백

 

 

1월 2일 방송 되었던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는 프로파일러 배상훈이 출연하여 고민 상담을 받았습니다.

 

 

- 배상훈

우리 가족은 서로 싫어한다. 이모가 무속인이었다.

이모가 귀신이 보인다고 했다.

(외가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털어 놓으며) 귀신들이 너희 어깨에 다 있구나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좋아하지 않는다.

친가 쪽 가족 구성이 별로 안 좋다. 오래 전에 집단 학살의 피해자였다고 해야 되나...

1948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 아시냐. 여수·순천 사건이다.

이념적 다툼이 가족 내에서 벌어지게 됐다.

 

 

 

 

- 여수 순천 사건

1948년 10월19일 일어났다. 광복 이후에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14연대 군인들과 정부군의 다툼으로,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 배상훈

집성촌에 있었는데, 그 집성촌에서 사상적인 문제때문에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 오은영 박사

너무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 배상훈

그래서 친척들이 서로를 싫어한다.

앙금들이 남아 있다. 아버지 형제가 7남매가 넘는데 그 앙금들이 남아있다. 아예 그 가족들은 서로 안 보고 있다.

 

- 오 박사

너무 가슴아픈 가족사입니다.

 

- 배상훈

큰 아버지가 아버지를 고발한 적도 있다. 가족 사이에 신뢰가 없다.

결혼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못하고, 겁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삶 자체가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파일럿을 지망했다. 공군사관학교의 모든 조건을 통과했지만, 연좌제에 걸려서 마지막에 불합격했다.

(파일럿의 꿈을 접게 된 후) 그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는데, 부모님 생각에 내색을 못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여순사건)
麗水順天十一九事件
Yeosu-Suncheon 10·19 Incident
  • 일시 : 1948년 10월 19일 ~ 10월 27일
  • 장소 : 전남 여수부·순천부·승주군 일대
  • 원인 : 남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남로당 장병들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 거부

 

  • 진압군 :  대한민국 국군, 미군, 전라남도 경찰국
  • 지휘관  : 제임스 하우스만, 이승만, 이범석, 김백일, 김종원, 김창룡,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 송호성, 원용덕, 정일권, 채병덕, 최남근

  • 반란군 :  국방경비대 14연대
  • 이현상†
  • 김지회†
  • 지창수†
  • 홍순석†

 

  • 결과 : 반란진압 성공
  • 진압 과정에 이르기까지 반란군(14연대 출신 반란군과 남조선로동당 당원), 경찰, 국군, 우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 영향 :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 구축
  • 학도호국단 창설, 국가보안법의 제정
  • 대대적인 숙군작업, 부대명에서 4자 삭제

  • 피해 : 확인 사망자 3,384명
  • 실종자 825명
  • 국가공무원 피해 3,474명
  • 민간인 피해 11,131명
  • 전라남도 지역 주요 사찰 소개
  • 진압군 측 사망자
  • 군인 180여 명, 경찰 74명
  • 반란군 측 사망자 : 불명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일대의 남로당 당원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고 일으킨 반란이며, 그래서 한 때는 여순 반란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는 여순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습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또는 여순병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순천을 빼고 려수 군인 폭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민족끼리에서도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북한에서 려수 군인 폭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수와 순천에서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수, 순천에 주둔하던 군부대의 병력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인데요. 소설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바로 이것입니다. 

 

 

- 배경과 원인

 

사건의 직접적 발단은 제주 4.3 사건 일부 진압 임무를 하달받은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동족상잔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공산 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