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수학자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학력 화형 위기 종교재판 망원경 천동설 지동설 생애 나이 출연진 구지훈 교수 알베르토 프로필 88회 재방송
2월 28일 벌거벗은 세계사 에서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절대 진리였던 천동설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하며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갈릴레오의 불편한 진실을 알아봅니다.
이를 위해 이날 강연에는 지난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편’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 구지훈 교수가 나섭니다. 구 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신의 섭리에 정면으로 맞선 갈릴레오의 위험하지만 위대한 도전을 전해줄 예정입니다.
구 교수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조롱과 비판을 받은 것은 물론, 한평생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최고의 무기를 단 이틀 만에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발휘했는데 이것은 바로 ‘망원경’이었던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직접 천체를 관측하며 천동설에 맞설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신이 만든 천상계에 대한 모독이라는 죄로 결국 종교재판에까지 끌려가 화형에 처할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겪었다는데요. MC를 포함한 출연진은 강연 내내 갈릴레오의 천재성에 놀라는 한편, 직접 갈릴레오의 실험을 체험해보기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들었다는 후문입니다.
한편, 오늘의 여행 메이트로는 이탈리아에서 온 알베르토와 과학 크리에이터 궤도가 함께 합니다. 특히 연세대학교에서 천문학과 인공위성궤도를 전공하고 한국천문연구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궤도는 강연에 소개되는 갈릴레오의 천체 연구와 이론에 대해 시청자 눈높이에 맞춘 상세한 설명을 더하며 한층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전망입니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2월 28일 (화) 밤 10시 10분 tvN에서 방송됩니다.
구지훈 프로필 직업
Gu, Ji-Hoon
▶ 직업 :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전화번호 : 055-213-3168
▶ 이메일 : jihoon.gu@changwon.ac.kr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로필 나이 학력 생애
▶ 본명 : 갈릴레오 디 빈첸초 보나이우티 데 갈릴레이 Galileo di Vincenzo Bonaiuti de' Galilei
▶ 출생 : 1564년 2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피사(現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
▶ 사망 : 1642년 1월 8일 (향년 77세) 토스카나 대공국 아르체피니(現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렌체 아르체트리)
▶ 국적 : 토스카나 대공국(메디치)
▶ 직업 : 천문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 학력 : 발롬브로사 수도원 (졸업, 1575~1578)
피사 대학교 (의학 / 중퇴, 1580~1585)
▶ 종교 : 로마 가톨릭
생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에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다.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550판까지 인쇄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4번째 대공인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당연히 토스카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쥐었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였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오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렸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교황청은 모든 성서 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서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라는 저서를 냈는데 이후 그 내용을 높게 평가하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만은 성서에 반하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의를 피사 대학으로부터 받자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이 편지 때문에 성직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고 종교 재판소에 회부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이 벌개졌으며, 재판소에서도 편지를 조사했지만 무혐의로 판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 성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재판소에 고발이 들어갔고, 재판소는 1616년 2월 24일 해당 도서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문에 피고인과 도서의 이름을 적지 않고 대신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갈릴레오에게 보낸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센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에게 받고 로마를 떠났다.
"천문 대화"를 저술했으나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당했고 끝내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가 온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의 망명도 고려했으나 결국 출석을 결심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 최종 판결을 6월에 받았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금고형으로 3년을 지냈는데, 한 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후에 시에나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 않나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유언이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 했지만,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했다. 교황청이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촐한 장례식을 치르게 강요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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