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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찰리 채플린 국적 영국 프로필 나이 블랙 코미디 거장 자녀 생애 공산주의자 결혼 FBI 추적 여자 관계 미국 할리우스 스타 출연진 정보 김봉중 교수 98회​

by 해피냥냥이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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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찰리 채플린 국적 영국 프로필 나이 블랙 코미디 거장 자녀 생애 공산주의자 결혼 FBI 추적 여자 관계 미국 할리우스 스타 출연진 정보 김봉중 교수 98회​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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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회​




벌거벗은 세계사 98회에서는 충격적인 여성 편력부터 위대한 걸작 탄생 비화까지, 찰리 채플린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파헤쳐 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를 위해 김봉중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강연에 나섭니다.



김 교수는 링컨과 노예 해방 편, 경제 대공황 편, 케네디가의 비극 편 등을 통해 미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소개해 온 역사학자.


이번 시간에는 미국의 현대사 그 자체인 삶을 살았던 블랙 코미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의 일대기를 전해줄 예정으로 기대감을 높입니다. 김 교수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희극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찰리 채플린에게 엄청난 반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3번의 이혼과 4번의 결혼 과정에서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FBI의 집요한 추적을 받다가 결국 미국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상상 이상의 복잡한 여성 편력에 은지원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전언입니다. 또한 영국 런던 빈민가 출신인 찰리 채플린의 특별한 연기 재능, 할리우드 입성과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등의 작품을 통해 배우 겸 감독으로서 승승장구한 일화, 세계대전의 참상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영화, 공포의 독재자 히틀러를 조롱한 영화 이야기도 들려주며 현장을 몰입하게 합니다. 오늘의 여행 메이트로는 미국에서 온 크리스와 칼 웨인이 함께 합니다.


첫 출연인 칼 웨인은 찰리 채플린에 대한 역사적 기록, 비하인드를 공유하며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만듭니다.



크리스 역시 “찰리 채플린은 유일하게 재미있는 영국인 배우”라는 1910년대 미국인들의 반응 등을 언급하며 강연에 재미를 더해줄 전망입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98회는 ​5월 9일 오후 10시 10분 tvN에서 방송됩니다.



찰리 채플린 프로필 나이 키 국적 
▶​​본명 :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 경 ​Sir Charles Spencer Chaplin Jr.
▶​출생 : 1889년 4월 16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사망 : 1977년 12월 25일 (향년 88세) 스위스 보 주 브베
▶​국적 : 영국
▶​신체 : 165cm, 62kg
▶​직업 :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 음악가
▶​활동 : 1895년 ~ 1976년
▶​데뷔 : 1914년 영화 '생계'
▶​배우자 : 밀드레드 헤이스(1918 결혼, 1921; 이혼)
리타 그레이(1924 결혼, 1927; 이혼)
폴렛 가더드(1936 결혼, 1942; 이혼)
우나 오닐(1943 결혼, 1977; 사별)
▶​자녀 : 6남5녀
아들 노만 스펜서 채플린(1919년~1919년), 7월 7일생으로 태어난지 3일만에 사망
아들 찰스 스펜서 채플린 3세(1925년~1968년), 배우이며, 영화 13편을 출연하였다. 향년 42세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사망
아들 시드니 채플린(1926년~2009년), 배우,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으로 뇌졸중으로 사망
딸 제럴딘 채플린(1944년생)
아들 마이클 채플린(1946년생)
딸 조세핀 채플린(1949년생)
딸 빅토리아 채플린(1951년생)
아들 유진 채플린(1953년생)
딸 제인 채플린(1957년생)
딸 아네트 채플린(1959년생)
아들 크리스토퍼 채플린(1962년생)
▶​종교 : 무종교



▶​정치/사회적 논쟁거리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정치적 성향이었다.《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개박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인 총통 양반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81]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프라우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거기다 찰리 채플린은 인종차별을 반대하였기에 KKK단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도 위협을 받고 하였으며 당시 인종차별주의로 유명한 FBI국장 에드가 후버는 찰리 채플린이 인종차별반대 나치 비판을 핑계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단정짓고 찰리 채플린을 감시 및 도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비미활동위원회'라는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타머스 인츠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츠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츠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혹은 피범벅이 된 인츠의 시체가 실려 나왔다)'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츠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 채플린, 그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츠가 요트 위에서 허스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츠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채플린이나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인츠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라는 인츠의 사인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츠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그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가 금지가 모두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였다.




찰리 채플린 여자 관계

채플린은 영화계에 남긴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여러 여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만났던 여성 대다수의 나이가 1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컸다. 그래서 사생활의 문란함이나 상대 여성들의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때문에 에페보필리아를 연구하는 측면에서도 꽤 무게감을 갖는 인물이기도 하다. ​채플린의 딸 중엔 그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70살이나 차이가 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남긴 것은 채플린 본인의 무분별한 성 생활도 문제였지만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 지지대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무 알레르기가 있어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헤티 켈리(1893년 ~ 1918년)
채플린이 카노 극단의 스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1910년에 만난 첫사랑. 당시 런던의 한 연극단에서 무용수로 일하던 15세 소녀였지만, 헤티의 부모가 채플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과 다섯 번의 데이트만 하고 헤어졌다. 켈리와의 비극적인 첫사랑이 훗날 채플린의 여자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걸로 알려져있다.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에드나 퍼비언스(1895년 ~ 1958년)
19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1918년 채플린이 밀드레드 해리스와 결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에사네이 영화사의 비서였으나 채플린의 추천으로 1915년 여배우로 데뷔했으며 에사네이~퍼스트 내셔널 시기의 거의 모든 채플린 영화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만든 첫 영화인 '파리의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파리의 여인이 흥행에 실패하고, 찰리 채플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다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주연까지 맡았으나, 이 영화는 끝내 개봉되지 못하고 파기되고 말았고,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그녀의 헐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사실, 워낙 찰리 채플린과 가까운 사이이다보니, 후술할 찰리 채플린이 두번째 결혼 상대였던 리타 그레이와 이혼할 때 일부 언론에서는 이혼 사유로 에드나 퍼비언스와 찰리 채플린의 친밀했던 관계를 이유로 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를 은퇴한 후, 항공 조종사였던 존 P. 스콰이어와 결혼해서 7년만에 사별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향년 62세로 타계한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죽은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저의 모든 일이 시작될 때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라며, 그녀와의 좋은 기억을 술회하기도 했다.




▶​밀드레드 해리스(1901년 ~ 1944년)
채플린이 29세이던 1918년에 처음 아내로 맞은 아역배우(당시 16세). 채플린과 밀회를 시작한 때는 무려 12살이었다. 채플린의 첫 아이였던 노먼을 낳았지만 노먼이 낳은지 3일 만에 사망했고, 그 뒤로 남편과의 계속된 불화[56] 끝에 1920년에 이혼했다. 프랭크 카프라 초기작에도 나와 좋은 연기를 펼치는 등 꽤 괜찮은 배우였지만, 크게 대성하지 못했고, 194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안타깝게도 그녀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의 필름이 거의 소실된 상황이라 그녀의 연기를 현 시점에서 보기가 어렵다.



▶​리타 그레이(1908년 ~ 1995년)
1924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 1920년 촬영된 《키드》에서 단역 천사들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밀드레드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6세였다. 《황금광 시대》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조지아 헤일로 교체되었다. 리타가 임신 사실을 빌미로 채플린에게 '결혼하지 않으면 낙태하고 언론에 소문내겠다'고 해서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다. 1925년과 1926년에 각각 시드니와 찰스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27년에 이혼했다. 이혼 소송 결과 채플린은 리타에게 60만 달러, 아들들인 시드니와 찰스에게 각각 10만 달러 씩 총 8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혼 소송은 미국 연방 정부에서 채플린을 탈세 혐의로 제기한 소송과 병행되었고, 덕분에 당시 작업하던 '서커스'의 개봉이 늦춰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이혼하였고, 그 후 평생을 홀로 살다가 1995년 암으로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사실상 찰리 채플린이 만나왔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된 여인이었으며, 실제로 그 두꺼운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에서도 나름 부인이었던 리타 그레이에 대한 서술은 단 한 줄밖에 기재가 안되어 있을 정도이며, 후술할 1992년 영화 《채플린》에서도 그녀에 대한 묘사는 1분도 되질 않을 정도이다.



▶​폴렛 가더드(1910년 ~ 1990년)
뉴욕 출신의 배우.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바나나를 훔치는 "집 없는 소녀"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매리언 데이비스처럼 지그펠드 쇼라는 1910년대 브로드웨이 쇼 출신이다. 목재 기업 사장인 첫 남편과는 1929년에 헤어졌고, 1932년 이혼이 완료됐다. 채플린과 1932년 사귀기 시작해 《모던 타임즈》가 개봉한 연도인 1936년에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찰리에게는 폴렛이 세 번째 부인, 폴렛에게는 찰리가 두 번째 남편이었다. 또한 결혼했을때 나이가 26세로 채플린이 결혼한 상대 중 유일하게 10대가 아닌 여성이었다. 결혼 생활은 밀드레드나 리타보다 길었지만 그래도 짧게 끝나서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1940년에 이혼했는데, 위의 두 여인들과 달리 매우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채플린과 이혼 후에도 파라마운트 영화사 등에서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1958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독일의 소설가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재혼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고, 채플린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80세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찰스와 폴렛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조앤 배리(1920년 ~ 2007년)
본명은 마리 루이즈 그리블(Mary Louise Gribble). 1942년에 잠시 사귄 여성. 채플린은 이 여성을 배우로 키우려고 했는데, 배리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 얼마 못 가 결별했다. 이후 배리는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혈액형 검사 결과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배심제의 폐해인 비논리적 판단에 따라 채플린을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했고, 결국 채플린은 판결에 따라 그 아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를 주며 부양해야 했다.

채플린은 이 재판에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렸고, 이후 비미활동위원회 조사 등과 더불어 미국에 급짜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배리도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정신병 증세의 악화로 1953년에 강제 격리되었고, 이후로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잊혀갔고, 2007년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40년 후 채플린의 FBI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FBI가 배리의 친자소송 배후에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채플린을 몰락시키기 위해 쫓겨나 채플린을 증오하고 있는 그녀에게 접근, 친자소송을 제안한 것이었다.#



▶​우나 오닐(1925년 ~ 1991년)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로 채플린의 마지막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다.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고, 채플린과는 무려 36살 차이였다. 다시 말해 이때 찰리 채플린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녀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채플린보다 겨우 1살 많다. 결국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그러나 이 점은 유진 오닐에게 책임이 큰데, 자세한 것은 유진 오닐 항목을 참고할 것. 채플린은 오닐과 결혼을 할 때 평소 자신을 '미국에 배은망덕한 영국인'이라고 욕하던 연예계 칼럼니스트 헤다 호퍼(Hedda Hopper)를 물 먹이기 위해 라이벌인 루엘라 파슨스(Louella Parsons)에게 자신의 결혼 특종 소스를 줬는데 이에 분노한 호퍼는 그간 자신의 정보원들을 통해 수집한 채플린의 온갖 정보를 FBI에 넘겨버렸고, 친공산주의자 성향으로 보일 수 있는 채플린의 행적들을 FBI로부터 제공 받아 기사화하며 반채플린 여론을 조성했다. 이는 1952년의 재입국 금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채플린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장녀는 제랄딘(1944).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찰스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에 유방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폴라 네그리, 루이즈 브룩스등을 포함해서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매리언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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