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에바 페론 에비타 나이 프로필 생애 남편 후안 페론 직업 아르헨티나 안드레스 알비올 뮤지컬 배우 정선아 아주대 사학과 박구병 교수 재방송 111회
벌거벗은 세계사
에바 페론 에비타 나이 프로필 생애
남편 후안 페론 직업
아르헨티나 안드레스 알비올
뮤지컬 배우 정선아
아주대 사학과 박구병 교수
재방송 111회
에비타 에바 페론 프로필 나이 생애
Eva Peron
▶ 본명 :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페론
María Eva Duarte de Perón
▶ 애칭 : 에비타 Evita
▶ 출생 :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사망 : 1952년 7월 26일 (향년 33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국적 : 아르헨티나
▶ 직업 : 배우 → 정치인
▶ 배우자 남편 : 후안 페론 (1945년 결혼)
▶ 종교 : 가톨릭
8월 8일 오후 10시10분 방송되는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박구병 아주대 사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는데요. 박 교수는 이날 아르헨티나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박 교수는 에비타가 과연 희대의 성녀인지 악녀인지, 그녀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의 배경을 짚었는데요.
시골 빈민층의 혼외자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배우의 꿈을 이루고 26살에 최연소 영부인이 된 뒤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일생과 그 과정에서 제기된 논란들을 상세히 소개하였습니다.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오른 에비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서민 구호 활동을 하고, 여성 투표권을 처음 법제화에 기여하는 등 노동자·여성·아이들을 위한 개혁안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는데요.
하지만 재단은 비자금 창고라는 의혹이 불거지고, 노골적인 우상화 작업과 언론 탄압은 에비타를 곤경에 빠뜨렸으며, 사후 미라가 되어서도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에비타의 두 얼굴은 방송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이날 여행 메이트로는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아르헨티나에서 온 안드레스 알비올이 함께 하였으며, 뮤지컬 '에비타'에서 에비타 역할을 맡은 바 있는 정선아는 그를 둘러싼 다양한 소문과 비화를 공유하였습니다. 안드레스는 에비타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와 에비타를 향한 국민의 인식을 전했습니다.
비참한 어린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5월 7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후닌으로 옮겨가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영화배우라는 꿈을 키웠던 에바는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가서 5년 만에 연예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녀는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슬픈 듯 하면서도 호소력이 짙어서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목소리는 우아한 미모와 함께 에바의 큰 무기가 되었다.
후안 페론과의 결혼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질 때쯤인 1944년, 에바는 당시 산후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한 이재민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아가던 후안 페론은 에바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1945년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에바는 대통령 선거에 참가한 남편 후안을 돕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그녀의 얼굴을 알리게 되었고, 에비타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에비타 신화
이후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고, 영부인이 된 에바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리고 본능적으로 그들을 이해하면서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쳤다.
이 와중에 프랑스로부터 식량 배급 약속을 받거나, 스페인에서의 아동 구호 활동, 노동 단체와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의 성립과 같은 자선 사업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도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고, 덩달아 남편 후안 페론의 인기도 치솟게되었다. 그러나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고, 1년 후에 부통령 후보로까지 지명되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1년 11월에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후안 페론은 에비타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지만 결국 건강 악화로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랜 투병으로 몹시 여위어 사망 당시 겨우 32kg밖에 나가지 않았다. 많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에바 페론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에비타 신화의 문제점
에바 페론의 개혁은 장점만큼이나 문제점들도 많이 있어서 완벽하게 성공한 개혁이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더군다나 남편인 후안 페론과 함께 종신통치를 하려는 낌새를 보인 것도 있었다.
사후의 수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민중들에게 추앙받고 있었던 에비타 신화의 불을 끄기 위해서 당시 방부처리 되어 있었던 에바 페론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몰래 빼돌렸다. 이후 1971년에 후안 페론 측으로 송환된 그녀의 유해는 1975년 이사벨 페론(후안 페론의 세 번째 아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었고, 에바의 유해는 대통령궁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구역의 두아르테 가족묘지로 옮겨져 안장된 후 현재까지 남아있다. 에바 페론의 유해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남편 후안 페론과 당시까지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에 의해 방부처리되었다.
현존하는 미라 가운데 그 방부처리가 손에 꼽힐 정도로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웹에서 검색하면 미라가 된 사진은 물론 미라로 만드는 작업 중인 사진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은 사후 엄청난 수난을 당했는데 후안 페론이 실각한 직후 군부는 미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귀 일부분과 손끝을 잘라 조사했고, 그 외에도 코가 깨지고 발이 훼손당했다. 에바 페론의 시체가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직후에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면 실로 안타까울 정도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시신은 네크로필리아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즈의 《산타 에비타》라는 소설과 알리시아 두호브네 오르띠스의 저서 《에비타 페론: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에서는 에바 페론의 시신에 정욕을 느껴 정신이 이상해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그녀의 시신을 방부처리 중인 사진을 보면 보존도가 괜찮은데다가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이며 죽은 시신이 아니라 잠자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이래저래 생전이나 사후나 수난이 많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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