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시즌3 16회 루프코리안 지붕 위의 한인들 흑인 조지 플로이드 로드니킹 사망 1992년 두순자 사건 LA폭동 사건 내용 정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3
LA폭동 사건에 관한 진실은?
단순하게 LA에 살고 있는 한인 교포들이 흑인들한테 갑작스럽게 폭동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었다라는 정도까지만 알려져 있는데, 이건 상당히 그 내용이 긴 사건입니다. LA 안에서 한인 상인들과 흑인들 사이의 서로 간에 안 좋았던 감정은 1970년대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본래 흑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중국 상인들이 사업체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미 다 이득을 취할 만큼 취하고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던 시점에 한인들이 조금씩 중국인들이 있었던 흑인들 거주지로 사업체들을 형성해 가면서 나중에는 결국 한인들이 전부 다 차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들은 중국 사람들이 이득을 많이 보았을 때부터 이들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많았는데, 중국인들이 물러나고 나니 이번에는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니 여기에서부터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간것인데요.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으로는 왜 이득은 흑인 동네에서 벌어가고 백인과 같이 살아가는가 였는데요. 왜 흑인 사회에 수익을 벌어간 만큼에 대해서 기여를 하지 않느냐에 대한 불만이 나온 것이죠. 이런 화두가 시작되면서 사건이 급격하게 심각성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LA 흑인 사회에 있던 흑인들과 한인 상인들 사이에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으며 서로에게 공격하고 테러를 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인들이 흑인들에게 그냥 단순하게 피해를 입기만 하다가 흑인들이 폭동이 나서 들고일어난 것이 아닌데요.
이런저런 피해를 많이 입었던 한국 상인들은 본래부터 흑인들에 대해서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흑인들이 공격적으로 나오게 되면 항상 맞서 싸우고 공격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흑인 영화들에서 나오는 장면에서 한국 상인에 대해서 악덕업자 또는 엄청 와일드한 인물로 묘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한인들이 약해 보이거나 약해서 이론 흑인 폭동이 일어난 것이 아닌데요. 1980년대에는 상당히 많이 한국인들이 흑인을 총으로 쏘아서 죽이거나 흑인들이 상점을 공격하거나 한국인을 죽이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죽 갈등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다가 1991년에 두순자 사건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전쟁 같은 형태로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LA폭동 사건으로까지 생긴 것인데요. 두순자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국인들이 정말로 이제는 당해봐야 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결국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게 되면서 이런 테러가 일어났던 것인데요. 1980년대까지 한국 상인들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흑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면서 현재까지도 한국 상인들은 상당히 터프하고 폭력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합니다.
두순자 사건이란?
1991년 3월 16일에 남부 LA지역의 한인 마켓에서 주인 두순자와 15세 흑인 소녀인 라타샤 할린즈가 다투던 끝에 결국 두순자가 할린즈를 총으로 쏴서 숨지게 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의 계기가 되었던 대표적인 사건인데요. 가게에서 운영을 하고 있던 두순자는 손님으로 찾아왔던 흑인 소녀가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책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도둑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두순자가 흑인 소녀의 책가방을 잡아채자 체격이 상당히 컸던 흑인 소녀는 주먹으로 두순자의 얼굴을 가격했으며, 이에 당황한 두순자는 바닥에 넘어졌다가 일어나면서 카운터 뒤에 숨겨 두었던 권총을 들어서 흑인 소녀를 향해서 발포하게 되는데요. 흑인 소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두순자는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3월 18일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어서 두순자가 할린즈를 뒤에서 총으로 쏘았다고 발표를 하였으며, 19일에는 검찰에서 두순자에 대해서 1급 살인죄로 기소를 하였습니다. 검찰 기소 이후에 한인과 흑인 단체의 지도자들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총격 파문 진화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21일부터 두순자의 엠파이어 마켓(Empire Liquor Store) 앞에서는 흑인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인근 한인 주류 상점 곳곳에서는 흑인들의 보복 행패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LA 폭동 사건 발생일 : 1992년 4월 29일 ~ 5월 4일
▶발생 위치 :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유형 : 폭동
▶원인 : 로드니 킹 사건
▶인명피해 : 사망 58명, 부상 2,383명, 체포 13,779명
▶재산 피해 : 약 10억 달러(1조 원)
1992년 4월 29일~5월 4일까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흑인들이 일으켰던 폭동인데요. 이 폭동에서는 미국 흑인을 비롯해서 히스패닉계 미국인까지도 가세를 하였으며,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4.29 시민 봉기(4.29 Civil Uprising)라고도 하며, 이 폭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로드니 킹의 이름에서 유래해서 <King Riot>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LA의 한국인들 역시도 인종차별을 포함해서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이들 사이에서는 현재까지도 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현지인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폭동에는 흑인을 비롯해서 히스패닉계 갱단들까지 무장을 하고 합세를 하게 되면서 경찰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폭동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아래와 같이 병력 투입 명령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LAV-25 장갑차
▶제1경기갑정찰대대
▶미합중국 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
▶제40 보병사단 헌병중대
▶여러 대의 험비, 트럭, 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 2000명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
그리고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를 18시간 안에 배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이 되었던 것은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요. 결국 전체 13,500명에 이르는 사단급의 군대가 이번 폭동에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진압을 하기 시작해서 5월 4일에 폭동이 전부 마무리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이 사건에 대해서 미국 사회의 그동안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서 질타를 하였으며, 경찰 당국에서는 로드니 킹이 먼저 경찰에게 폭행하였음을 밝히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여론에 대한 물타기라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피해자의 인종을 떠나서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면서 경찰에게 폭행을 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지만, 이것에 대응한 경찰의 폭행이 과잉진압이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요. 물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이후로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이 표면적으로는 철폐가 되었지만, 이것은 법적으로만 철폐가 되었던 것이지, 인종차별 주의자들의 인식까지는 바꾸지 못했습니다. 폭동이 발생했던 지점과 그 인근에서는 많은 코리아 타운이 있었으며, 현재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사회로 알려져 있는 컴턴은 LA의 코리아 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무슨 일이 있어서 본인들의 동네 외곽으로 나오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한국계 미국인들 살고 있는 동네였던 것이죠.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폭력에 노출이 되었던 한인사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요. 최종적으로 집계가 되었던 한인사회의 피해 규모는 최소 3억 5,000만 달러어치에 이르는 손해 점포 2,300여 곳과 손실 등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한인 상점 가운데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자경단의 활동 덕분인지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던 한인은 없었으며, 유일하게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9살의 이재성 씨로 이것도 한인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합니다. 각자를 폭도로 착각하면서 일어났으며,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인 사회가 이번 LA 폭동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흑인들과 한인들 사이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을 했겠지만,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한인들에 관한 불만을 노래를 만들어서 비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래퍼 아이스 큐브의 Black Korea란 곡인데요. 한인 가게들 역시도 흑인 손님들에 대해서 차별을 했었는데, 이것은 LA에서 갱단과 범죄율이 높아지게 되면서 더 심해져 갔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한인 가게들이 아예 흑인 직원들을 고용하지 않는 수준까지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죄 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흑인들까지도 차별을 하고 무례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이 폭동 사건 이후로 한인 사회에는 2가지 변화된 부분이 나타났는데요.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국 국적을 취득해서 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받아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폭동 이전까지는 한인들이 한인 공동체에서만 생활을 했으며, 경쟁 대상도 동일한 한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영주권까지 취득하는데 까지만 하였고 그렇게 미국 시민권 취득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성공에 관심이 높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정치가 하고의 교류라던지 본인들의 권리 상승을 노린 집단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낮았으며, 이 때문에 소수 인종임에도 본인들의 권리 상승을 위해서 집단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흑인들에 비해서 본인들의 권리에 대해서 더 주장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2월 3일 1992년 LA 폭동이 일으킨 아메리칸드림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29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조성환 씨(42)는 LA에서 주류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1992년 4월 29일, 평소 하고는 다르게 손님이 없어서 의아해했던 그날 오후에 갑작스럽게 이웃 남자가 급하게 자신의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인근 대로에는 수많은 흑인들이 몰려 들어서 운전자를 폭행하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가게 밖은 순식간에 방화와 총격이 벌어지는 폭동으로 바껴버렸으며, TV에서는 계속해서 대피를 하라는 속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서 급히 차에 타서 조성환 씨가 바로 출발하려는 그 순간, 어느새 흑인 폭도들이 몰려들어서 좀비 떼와 같이 차를 둘러싸고 공격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지붕 위의 한인들, 루프코리안
교민 여러분! 우리 가게는, 우리가 지킵시다! 흑인 폭도들의 공격 목표는 한인 타운인것 같이 보였는데요. 강도로 돌변한 흑인 폭도들은 마치 쇼핑을 하듯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닥치는 대로 부수며 불까지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듯 거리에서 총을 든 한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전사 출신, 해병 전우회, 심지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앳된 얼굴의 청년들까지 집결을 하면서 한인 타운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전투에 돌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LA 경찰은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던 이날, 무너지는 아메리칸드림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의 피눈물과 그 뒤에 숨겨졌던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 출연진
허니 제이
장항준 감독
윤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 2월 3일 밤 10시 30분 방송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