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시즌3 복싱선수 김득구 프로필 아들 김지완 부인 아내 이명미 직업 나이 키 미국 붐붐 레이 맨시니 경기 1982 WBA 라이트급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3 62회
1월 19일 밤 방송에서는 전사의 심장과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복서 김득구를 조명합니다.
복싱은 1970년대, 고달픈 하루를 보낸 사람들을 열광케 한 국민 스포츠입니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눈을 반짝이며 경기를 지켜보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김득구. 유난히 가난했던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했던 득구는 가족들 몰래 홀로 상경해 닥치는 대로 일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맨주먹 하나로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는 복싱은 한줄기 빛이요 희망이었습니다.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거야!”
득구는 무작정 당대 최고의 복싱 명문, 동아체육관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관장님이 못다 이룬 챔피언의 꿈을 이뤄드리겠습니다!”
패기 있게 체육관 생활을 시작한 김득구는 직접 개발한 독특한 운동법과 꺾이지 않는 집념으로 관장님의 눈도장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옵니다.
프로 데뷔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승승장구하는 김득구. 마침내 동양 챔피언 김광민과의 승부를 앞두게 됩니다. 복싱계는 입을 모아 탄탄한 실력을 갖춘 복싱 스타 김광민의 승리를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득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김득구! 무서운 기세로 김광민을 압박합니다”
당시엔 드물었던 공격적인 성향의 왼손잡이 복서 김득구는 ‘링위의 불도저’ 김광민을 압도하며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게 되고 새로운 동양챔피언이 된 그의 이름이 신문 곳곳에 대서특필됩니다. 이제 세계챔피언까지 단 한 계단만이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득구야, 너 미국에서 경기 뛰어 볼래?” “감사합니다! 죽기 전에는 링에서 안 내려오겠습니다”
당시 한국 복싱 선수들에게 무덤이나 다름없었던 미국 원정 경기. 상대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였습니다. 24전 23승 1패의 전적을 가진 세계 최강의 복서였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득구가 승리할 확률은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득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맨시니와의 경기를 승낙했습니다. 1982년 11월 13일, 마침내 복싱 강국 미국이 배출한 세계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와 동양 작은 나라의 무명 복서 김득구가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 올랐습니다. 맨시니의 일방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던 경기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오히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비는 도전자 김득구에게 챔피언 맨시니가 밀리는 상황까지 발생합니다. 한 남자의 인생을 건 도전, 복싱 역사상 가장 뜨거운 논란을 낳았던 그날, 그 경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느 덧 예순이 넘은 레이 ‘붐붐’ 맨시니가 특별 출연해 40년 전 그날과 자신을 향해 전사처럼 덤볐던 도전자 김득구를 추억합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대배우, 박명훈입니다. 영화 '올빼미'로 '기생충' 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 그가 또 다른 매력을 들고 꼬꼬무에 찾아왔습니다. 박명훈은 그날의 경기 영상들이 플레이되자 쓰러져도 포기 하지 않는 김득구 선수와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탄탄한 보컬과 폭발적인 고음실력으로 타칭 ‘헬고음녀’, 자칭 ‘원조 꼬물이’ 가수 박혜원(HYNN)이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오게 됐다며 기대감을 보이던 박혜원은 노래 실력만큼 시원시원한 리액션으로 장성규와의 찰떡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박혜원은 집을 떠나는 김득구에게 어머니가 내민 이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올 겨울, 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꿀 보이스의 소유자 위아이의 김요한이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함께했습니다. 김요한은 본인의 태권도 선수 시절을 되돌아보며 김득구의 도전과 불굴의 정신력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누구보다 김득구의 마음을 잘 아는 김요한이었기에 녹화 내내 진지한 눈빛으로 장도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모두가 권투에 열광하던 그 시절 우리는 모두 가난한 도전자들이었습니다.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한 청년의 결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예순 두 번째 이야기 '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 1982 최후의 도전' 은 1월 19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송됩니다.
레이 맨시니 프로필 나이 키
▶ Raymond Michael Mancini
▶ 권투선수
▶ 출생 : 1961. 3. 4. 미국
▶ 키 : 164cm
▶ 경력 : 1982.05 세계권투연맹(WBA) 라이트웨이트급 타이틀
1981.05 북미권투연맹(NABF) 라이트웨이트급 타이틀
김득구 프로필 나이 키
▶ 金得九, Kim Duk-koo
▶ 출생 : 1956년 8월 10일 강원도 고성
▶ 사망 : 1982년 11월 18일 (향년 26세) 미국 라스베이거스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68cm
▶ 종목 : 복싱
▶ 전적 : 20전 17승 (8KO) 2패 1무
▶ 수상 : OPBF 전 라이트급 챔피언
대한민국의 前 권투 선수 김득구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다.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해인 1982년 이영미와 약혼했으며, 그 해에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김득구 복싱 경력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한다. 이후 같은 해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지면서 OPBF타이틀도 3차 방어전까지 해냈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 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랭킹 1위가 되었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서술한다. 이후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붐붐"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에 들어갔다.
김득구 생애 마지막 경기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다. 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 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 때 허용한 집중타로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다. 운명의 14회.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사진이 바로 이 때 찍힌 장면이다. 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만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하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심판이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김득구 사후
그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다. 아들 김지완은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랐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맨시니의 대변인이 위 정보를 전면 부인하자 UPI통신은 허위보도를 한 이탈리아 언론을 탓하며 정정보도를 냈다.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사망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의 사망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전과 같은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한 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 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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